영축산(1081m・양산)
하루가 다르게 변화가 느껴지는 가을 볕드는 날,
영축산으로 가을 마중을 나간다.
여기저기서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니
화려한 영축산 억새도 활짝 피었을꺼라는 기대감이 있으니 말이다.
저마다 느껴지는 세월의 속도가 다르다 하던데
이번 가을은 특히나 더디게 여유 부리며 오는듯한 가을을 빨리 맞이하고 싶어서,
산행 코스는 청수골산장∼시살등∼죽바우등∼채이등∼함박등∼영축산∼단조산성∼청수골로,
14.7㎞, 원점 회귀 산행.
배내골에서 주차시킬 곳을 찾다가 백련암 부근 공터에 주차시킨 후
청수골 산장 우측 산길로 청수골로 들어선다.
계곡과 함께 이어진 산길을 걷다가 청수 좌골과 우골 합수지점에서
골짜기를 건너야 하는데 그냥 직진해버렸다.
그래도 골짜기를 다시 건어야 하는데 건널수 있는 지점 찾기가 쉽지 않아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니 문득 오솔길은 우측 지능선을 향한 된비알로 접어들고
지금껏 걸어온 걸음이 아까워 결국 능선을 걸어도 시살등에 도착할 수는 있기에
그냥 올라버렸다.
능선을 구불구불이어진다.
산죽길이 놓였다가
갑자기 된비알이 되기도 하고
그러다 첫 번째 이정표를 만난 후에도 오름길을 꾸준히 오르면
지난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이 이곳저곳에 널부러져 길을 막고 있다.
수십 년생 나무가 뿌리를 드러내기도 하고 또는 허리가 끊어진 채 쓰러져 있다.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고 했던가.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최문자의 시 ‘닿고 싶은 곳’ 중에서
쓰러진 나무를 피해 오르막길과 씨름하며 이어지는 숲길을 걷다보면
하늘이 뚫리고 키 낮은 억새가 하늘 거린다.
시살등이다.
조망이 좋은 시살등(981m).
영남알프스 준봉들이 대개 험한 암봉인데 시살등만 부드러운 흙봉우리로
시살등은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때 아군은 영축산 인근 단조산성을 거점으로 왜군과 싸웠지만
수적인 열세와 영축산의 산세를 파악한 왜군에 끝내 산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때 아군이 다시 전열을 정비한 곳이 바로 시살등.
소등처럼 부드러운 이곳에서 왜군과 마지막 항쟁을 하며 화살을 많이 쏘았다는 데서
'화살 시(矢)' 자를 써 시살등이라 명명됐다 한다.
청수골에서 제대로 올라왔다면 먼저 닿았을 한피기고개.
죽바우등을 넘어 영축산 방향으로 간다. 부드러운 숲길이다.
전망대와 무명 암봉을 거쳐 암봉인 죽바우등에 닿는데
시살등에 버금가는 영남알프스 전망대로
차이라면 기암절벽이 장벽을 이루는 영축산의 위용과
영축산에서 남으로 시원하게 뻗은 영남알프스 마루금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발밑의 통도사와 극락암 비로암 등 산내 암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죽바우등에서 영축산 방향으로 진행하다 만나는 중앙능선 갈림길.
갈림길에서 채이등 표시가 없어서 우측 정상으로 올라봐도 아무런 표시는 없다.
암튼 이곳이 채이등인건 맞을 것 같다.
우뚝 솟은 함박등(1052m),
그 아래로 천 길 낭떠러지가 이어진다.
거대한 톱날이 삐죽삐죽 치솟은 듯 날카로운 바위능선은 함박등을 내려서며 끝이 나고
산에는 억새 평원이 펼쳐졌다.
영축산 정상에 오르면 지나온 기암 능선과 신불산 방향 초원능선 모두
고개 한 번 돌리는 것으로 조망된다.
남과 북의 능선 풍광이 극적으로 다르며,
세상에 다시없을 절경이다.
요즘은 누구나 쉽게 오르지만
산이 처음부터 세속적인 공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더 그랬던 것 같다.
오죽하면 '산을 연다'는 개산(開山)이 '절을 세운다'는 뜻일수도 있는게
그런 불교 흔적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는데
영축산은 그중 하나다.
그만큼 불교적 색채가 짙게 밴 명산이라는 얘기로
영축산은 인도어 '그리타쿠타'(팔리어로는 '기자쿠타')를 의역한 한자식 표현이라고 한다.
부처가 법화경을 설파한 인도 동북부의 라즈기르 산 정상에 놓인 암봉이 그리타쿠타인데,
우리말로 '독수리 바위'로 해석될 수 있고
이를 한자어로 의역한 것이 '영험할 영(靈)'과 '독수리 취(鷲)'를 합친 '영취산'으로,
'영취'의 불교식 발음이 '영축'이라고 하니 말이다.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억새의 바다,
가을이면 산 곳곳이 억새로 가득 한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곳,
억새 군무에 파묻혀 가을을 탐하는 곳이
지난 18호태풍 미탁의 영향인지... 억새는 누런잡풀이 되었다.
산길은 단조산성터를 지나 청수 좌골로 이어서 내려설수 있다.
가을 산은 두 가지 이미지가 연상된다.
온 산을 화려하게 물들이는 단풍, 그리고 달빛 아래 은은하게 유혹하는 억새풀.
우열은 없으되 시기의 차이는 있고
단풍은 아직 일러, 억새 평원 은빛 군무를 맞이하러 나선 걸음이
억새평원은 지난 태풍의 영향으로 누렇게 변해 버렸지만
가을바람을 타고 그 험한 바윗길을 오르내렸고,
바람에 떠밀려 넓은 평원을 맘껏 누렸으니 이런 날도 괜찬은 가을마중 일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