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거기, 지리산이 있었구나.
도시의 높은 빌딩에서 악수를 하고 나오는 젊은 비즈니스맨도 알고보면 불청객이고
외딴섬 풀밭에 앉아 땀을 씻는 나도 불청객이다.
아무도 이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고 싶었을까.
민박집 마루에 배낭을 놓고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 손발을 씻는다.
집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이 서먹서먹해진다
낯설다. 집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낯설다. 그런 낯으로 호박꽃을 본다.
‘호박꽃도 꽃이냐’ 얼마나 섭섭한 말인가.
그래서 오늘 아침 호박꽃은 명랑하다.
외로운데서 얻는 아름다움, 나는 그것으로 시를 쓴다.
이생진 시인의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는다” 에서
지리산 천왕봉 찾아가는 길
작은 숲 사이로 난 소로를 따라
자욱한 안개 속을 지나고,
2019. 8. 4. ~ 2019. 8. 5.
성삼재, 노고단, 연하천, 칠선봉, 촛대봉, 천왕봉, 백무동까지
37km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은 길에
끌림 하나 가슴에 품고 예전 그대로의 산줄기를 따라
천왕봉 보러 나선 길에,
2019. 8. 4. 일요일
성삼재___세석대피소
노고단 대피소에서 1시간 30분 맘 편히 쉬고,
노고단 정상에서 다시 30분
일출을 보고 먼 길 나서기로 했다.
아직 어두운 산길엔 어디서 밤을 보내고 왔는지 모를 많은 객들로 분주한 대피소에서
따뜻한 커피한잔과 김밥 한줄을 나눠먹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난 후
노고단에 올라서 바라보는 일출.
별들이 빛을 잃어가고
하늘은 붉은 빛으로 밝아오는 지리의 아침
그 하늘빛이 좋은 아침에 노고단을 지나 천왕봉으로 간다.
무더운 날씨에 페이스를 잘 유지하자며 한 발 한 발 천왕봉행 등산로에 발을 올리면
숲에 아침이 들고
아직은 새벽 6시쯤 풀벌레 소리를 벗 삼아 가슴 뛰는 지리산 산길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질풀
산에서 놀고 즐기는 산행을 하자고 결심한 때문인지
느릿하게 진행하니
햇살 돋은 아침에 길섶 야생화가 눈에 들여찬다.
5개의 꽃이 한쪽 방향으로 굽어
바람개비 모양의 물레를 닮아 물레나물
8월 보랏빛의 비비추
임금님 상에 올려 졌다는 어수리
근심을 잊게 한다는 망우초,
원추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경계선이라는 의미로 삼각형의 이정표, 삼도봉을 만난다.
뒤로는 반야봉이고. 남쪽으로는 경남 하동군이나 전남 구례의 어디쯤,
앞으로는 장엄한 지리산 주능선길이 펼쳐지는 곳이다.
산박하 인지 아님 오리방풀(?)인지 몰라도 예쁜 꽃
꽃말은 ‘영원한사랑’이며
지리산 주능에 가장 많이 피어있던 꽃, 모시대
지리산 10경중 4경인 벽소한월(碧宵寒月)은
세석까지 가야하는 일정으로 스쳐가는 한 지점이 되었다.
햇살은 따갑고 습도는 높은데
이제 덕평봉을 오른다.
늘 지리산길을 걷다보면 벽소령에서 세석까지의 길이 가장 힘들다고 느껴진다.
선비샘.
우리나라 큰 산의 능선에서 물이 풍부한 곳은 지리산이 유일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선비샘과 임걸령 샘물이 고맙고
한 통의 물을 발칵발칵 들이마신 뒤 또 한통은 배낭에 꽂고 영신봉을 향한다.
제석봉과 천왕봉이 벌써 가까워졌다.
영신봉 나무 계단을 올라 한숨 크게 쉬고 나면 어느덧 세석이 보인다.
다 왔다.
영신봉에서 촛대봉에 이르는 세석평전,
이 높은 고지에 이런 평원은 1500m 이상의 고지대에
이처럼 아름답고 넉넉한 평원이 지리산을 더욱 사랑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이면 평원을 지나 촛대봉에서 일출을 맞이하리라.
기대하며 세석에 머문다.
2019. 8. 5. 월요일
세석___천왕봉___백무동.
세석대피소에서 1박,
옆에서 자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통에 잠을 자지 못해도
어느새 새벽이 왔다.
일찍 밥을 해 먹고
신새벽 길을 나선다.
계획은 촛대봉에서 천왕봉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고 연하선경을 즐기다가
느긋하게 천왕봉을 오르는 것이었는데
습도는 충만하고 안개가 짙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이제나 저제나 오신다는 그대 마중나온
구절초
꽃이 무거워 이리저리 흔들리다 힘에 부쳐
넘어져서도 편안하게 꽃을 피우는 흰 모시대를 보면
초탈함과 무심의 상태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습도가 높은 와중에도 바람은 싸늘해 바람 맞는 느낌이 좋다.
연하선경을 향해 걷다가 쉬고, 쉬다가 걷고 하며 드디어 연하선경
세석산장~연하봉까지의 능선길이 연하선경이다.
25.5㎞의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길 또한 운무에 갇혔지만
등산로 주위의 비비추, 쑥부쟁이, 원추리가 지천으로 깔리고
한번씩 지나가는 바람이 운무를 살짝 걷으면 이 길은 여전히 우아하다.
비슷한 꽃 들인 배초향과
가을의 향기 꽃향유도 피어나고,
송이풀
장터목산장.
과거에 백무동에서 올라온 사람들과 중산리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물물교환했던 그 곳이건만
이제는 장사라곤 대피소가 전부일 뿐 등산객들의 발걸음만 남아있는 곳이 됐다.
장터목에서는 흐르던 구름이
천왕봉 주변은 두텁게 감싸 멈춰 버렸다.
제석봉과 통천문, 그리고 등산로 주변의 시야가 갇히니
길가장자리에 즐비한 야생화들이 눈에 자꾸 들어오고
구상나무와 고사목들과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끌어올린다.
지리산 천왕봉,
'한국인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는 정상석은 선명해도
여전히 구름에 쌓여있다.
그래도
1,915m의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 정상석 앞뒤로 담고
내 얼굴이 담긴 인증사진도 한 장.
그래야 놀고 즐기는 산행이 완성 될테니...
천왕봉 오름길에 눈에 뜨지 않던 술패랭이꽃이
하산길엔 보인다.
오르면 내려오는 게 산의 섭리일테니
차를 세워 둔 백무동으로 하산한다.
아무도 오라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오고 싶었던 건
다시 그리워하기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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