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매산 (1108m, 합천)
흔들리는 너, 일렁이는 나.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으악새란 억새의 경기도 방언으로
억새가 몸을 부딪치며 내는 소리를 표현한 노랫말이라고 한다.
사그락 사그락... 푸른하늘 아래서 우는
은빛 억새를 만나러 황매산으로 간다.
가을 황매산은 은빛 억새가 수십만 평 평원을 하얗게 물들인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왠지 마음이 울렁거려 고개를 돌려보면,
그 곳에 이미 가을이 와있었다.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라 한다.
아직 단풍은 뜨겁게 타오르지 못하고
억새는 높은 하늘로 날지 못하는데
불현듯
벌써 시월, 한 해의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반짝이는 하얀빛깔 군무와 사각거리는 바람의 소리,
억새의 계절이다.
억새는 가을의 산들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지만,
그 무리가 많을수록 감동이 커진다.
가을은 당연한 듯 단풍이라고 생각하지만,
올해는 억새가 더 그리웠다.
민둥산에서 시작하여
화왕산, 신불산, 영취산을 거쳐 황매산에 이르렀다.
이곳 억새는 가을날 오후의 햇살에 딱 어울리는 지형과 바람을 가지고 있다.
가을 황매산 산행은 오후에 시작하는 게 제격이다.
기우는 가을 햇살을 받은 억새가 능선으로 부는 바람에
불꽃처럼 하얗게 피어 오른다.
빛을 잃은 낮은 구릉은 푸르스름한 배경이 되어
마지막 한줌의 햇살까지 빨아들이는 억새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기울어가는 가을햇살을 머금은 억새군락에 바람이 불면 거대한 꽃물결이 된다.
억새군락이 온통 소금을 뿌린 것처럼 하얗다.
하얗게 꽃대를 피어 올린 억새가 넘실댄다.
빛을 등지고 보는 억새의 솜털이 매끈한 모습이라면 역광으로 보는 억새는 목화처럼 복슬복슬하다.
억새 꽃, 속살로 파고든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하얗다.
산등성이로 부는 바람은 끝없이 머리채를 흔들고,
억새군락은 순식간에 소금밭보다 하얀 물결이 된다.
때로는 일렁이는 불이고,
때로는 휘몰아 치는 파도다.
빛을 잃은 억새는 스스로 배경이 되어 마지막까지 햇살을 머금은 억새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낮은 골짜기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우면
등성마루의 억새는 남은 햇빛을 모조리 흡수한 듯 하얀 불꽃처럼 피어 오른다.
나무계단을 올라 가뿐 한숨 돌려 아래를 내려다 본다.
오른편으론 산청 차황면의 다랑논이 산줄기 사이사이에 누런 풍경화를 그리고,
겹겹이 희미해지는 능선 끝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왼편으론 황매산 끝자락 모산재의 화강암 바위 능선이 당당하고
하얀 자태를 뽐낸다.
어디를 둘러보나 사방이 툭 트였다.
제법 늦은 시간,
트랭글이 일몰시간 전 하산하라고 울어댄다.
일몰 시간에 맞춰 황매산을 올랐는데....
이 시간이 좋다.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시간이다.
태양이 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 때
역광으로 보는 억새가 진짜다.
일몰의 시간, 황매산 산정에는
눈부신 금빛 억새들이 서로를 부대끼며
바스락 거리면서 부르는 합창소리가 석양으로 스며든다.
시월의 이른 가을날 오후 빛과 바람의 선율에 몸을 맡긴 황홀한 억새 춤으로....
여전한 가을 앓이 중이다.
맑은 날에
가을이 되고
억새가 피었다.
한줌 실바람이라도 스치면
파르르 몸살을 앓듯 가녀린 여인네의 자태마냥 서럽도록 아름답다.
어둠침침한 날에는 뼈에 사무칠 정도로 스산하다가
이내 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이 부실 정도로 화사하다.
역광에 반사되면 찬란한 은빛 억새로 변신하고
석양에 비치면 수줍은 듯 홍조를 띠다가
달빛에 젖으면 이내 푸근한 솜털억새로 옷을 갈아 입고서
드문드문한 중년의 하얀 귀밑머리처럼 찰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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