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우호관 (대구어디까지 가봤니? 10번째)
사무라이 사야가(沙也可) 조선인으로 살다-녹동서원
-임진왜란....그리고 김충선 장군-
임진왜란의 왜장이 김충선 장군이다
달성 땅 곳곳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바로 가창면 우록마을의 녹동서원이다.
외양으로 보자면 녹동서원은 왜소하기 짝이 없다. 규모도 작거니와 세월의 묵은 맛도 도대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의 특별함은 서원에 모신 인물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조선에 상륙했으나 조선의 기풍과 앞선 문물에 감화돼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귀순한 스물한 살의 왜장이 있었다.
그가 귀순을 결심하고 조선의 경상병마절도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이렇다.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불행하게도 문화의 땅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의 나라에 나서 때로는 눈물짓기도 하고 때로는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
그는 조선으로 귀화한 이후 왜군과의 싸움에 여덟 차례나 나가 빼앗긴 성을 되찾아오는 등의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런 공적으로 그는 정이품 벼슬을 받고 임금에게 김씨 성을 하사받아 '김충선'이란 이름을 얻어 조선사람이 돼서 살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조정에서 내린 논밭을 다 마다하고 그는 우록마을에 소박한 거처를 두고 평생을 머물며 학문을 닦았다.
이후 지금까지 그의 후손은 전국에 7000명을 헤아린다.
일본인 사야가, 아니 조선인 김충선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 바로 녹동서원이다.
서원은 보잘것없지만, 달성군이 2012년 5월 3일 이곳에 '한일우호관'을 세웠다.
이쯤에서 대두되는 의문 한 가지. 김충선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우호의 인물이겠지만, 일본인들에게도 그럴까.
한창 전쟁 중 적에 투항한 그를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역자나 '천하의 매국노'쯤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념관에 '한일우호'의 이름을 붙여도 되는 것일까.
실제로 김충선은 오래도록 일본 역사학자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조선이 꾸민 조작극'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녹동서원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김충선의 귀화 400주년이 되던 1992년 일본 NHK 방송이 '출병에 대의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란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면서
그는 일본에서 '천하의 매국노'에서 '위대한 평화론자'로 부활했다.
녹동서원
한일우호관과 함께 있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소재. ‘사슴과 벗하는 마을’(友鹿里)이란 의미다
이 산골 마을에 김충선을 기리는 녹동서원과 한일우호관이 있다
임금이 내렸다고 해서 본관을 ‘사성(賜姓) 김해 김씨’이고 그 시조가 된 김충선 장군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한 뒤 산세가 좋은 이곳 우록리에 뿌리를 내렸다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한일 교류사를 되돌아보게하는 것으로 의미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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