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깊이로 걷는다.
조계산(884m, 순천)
이 봄, 눈물이 나면 혼자서라도.
조계산은 깊이가 넉넉하다.
유유히 산을 누비며 봄 햇살에 젖어든다.
2018. 3. 11. 일요일
선암사_장군봉_접치재_연산봉_굴목재_송광사
12.5km, 5시간 20분.
태평양의 마리아나 해구처럼 하염없이 깊다는 선암사 뒷간
정월 초하룻날 똥을 싸면 그 떨어지는 소리가 섣달 그믐날 들린다고...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는 정호승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서라도, 걸어서라도
선암사에 꼭 가라고 한다.
멀리 순천의 선암사까지...말이다.
선암사는 눈물의 절이기에
더 큰 눈물은 작은 눈물을 덮는다.
볕 좋은 날이다.
겨울은 지난 것 같고
여태 봄은 오질 않은 것 같다.
냇가 물소리 들으며 선암사로 올라가는 길엔
보물 제400호. 높이 7m, 길이 14m, 너비 3.5m로 화강암으로
아치형 다리로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선암사 승선교
전라남도 순천의 선암사엔 선암사만의 힘든 역사가 있다.
선암사는 한국의 대표적 불교종단인 조계종이 아니고 태고종의 대표 사찰이다.
태고종은 대처승 제도를 수용한 종법에 혼인이 허용된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라라는
요지의 유시가 본격적인 갈등의 시작이었으나
실은 해묵은 갈등의 표출에 불과하였다.
이후 대처승 측과 비구승 측은 오랜 힘겨루기가 이어지다가
이후 대처승 측이 1970년 ‘한국불교태고종’이라는 이름으로 창종하고
양측은 법적인 싸움을 일단락 짓는다.
하지만, 아직도 여러 사찰의 관할권을 놓고 갈등은 그대로 남아
사찰 내외부에서 물리적 충돌 및 많은 갈등을 겪어 오면서
지금까지 한국 불교의 한 맥을 지키고 있는 눈물과 한(恨)의 사찰이다.
선암사가 널리 알려진 시기는 1990년 후반부터였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75)의 영향으로
조정래 작가의 부친이자,
현대시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 싶다’의 저자인 조종현(1906∼1989) 시인이
선암사 부주지를 지낸 철운(鐵雲)스님이었다.
오랜 사찰로서의 풍광....
사찰 경내에는 보물 제395호 선암사 삼층석탑과 보물
제1311호 순천 선암사 대웅전 등 다수의 주요한 문화재를 던져두고
마음이 원통전 각황전 담길을 따라 위치한 매화나무로 향해 바쁘다.
600년 된 매화나무는 아직 추위를 이겨내지 못한 것 같다.
혹여 몽우리라도 살짝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발걸음을 쉽게 돌려보내지 않는다.
유명한 선암사 해우소.
크고 높기로는 국내 최고로
문화재청에 순천 선암사 측간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런데 근심을 푸는 장소인 해우소에선 주의할 점이 몇가지 있다.
첫째,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지 말아야 한다.
둘째, 낙서하거니 침을 뱉지 말아야 하고, 힘쓰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셋째, 외우고자하는 게송이 있다면 외운다.
넷째, 용변을 마친 뒤에는 반드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나오며,
다섯째, 손을 씻기전에는 다른 물건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울지 말라는 말은 없다.
대각암뒤로
넉넉하고 만만하게 산세가 그려진다.
그런데 올라보면 쉽지 않다.
제법 더워진 온도에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고 오르려니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오르는 다수의 어르신들이 조용한 산길을 방해한다.
마실 가듯 막걸리 한잔씩들 걸쳐가면서.....
2018년3월13일(화)부터 산에서 음주 전면 금지된다.
산에서 음주하다 첫번째 적발시 벌금 50,000원, 두번째 적발시 벌금 100,000원,
왁자지껄...어르신들을 앞질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884m),
조계산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의 길목으로
광주 무등산과 장흥 제암산, 보성 일림산을 거쳐 나온 줄기다.
그리고 오성산을 거쳐 광양 백운산으로 가지를 뻗는다.
장군봉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시원하다.
파란 하늘에 완만한 능선이 걸렸다.
바람이 나무에 부딪혀 거친 소리를 낸다.
능선을 이어붙여 연산봉으로 간다.
부드럽고 잘 정비된 등산로에서 접치재정상 팻말을 만난다.
역시 산세가 부드럽고 넉넉해
만만할 정도로 허술해 보인다.
대부분 능선을 따라 길이 나 있다.
봄에는 이 능선에서 철쭉이 예쁠 것 같다.
햇살 좋은 숲을 지난다.
걷기 좋은 날이다.
햇살이 그대로 피부에 와 닿는다.
느낌이 좋다.
조계산 연산봉에 이른다.
굴목재
잠시 다리쉼을 하고 길을 송광사로 이어간다.
굴목재에서 송광사로 이어진 이 길은 끊이지 않는 계곡물 소리,
굴참나무 낙엽이 바람에 실려 발길 사이로 까끌거리는 소리,
새들의 지저귐이 어울린다.
그래도 얼었던 땅이 녹으며 진흙구덩이로 변한 산길은 위험하다.
송광사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신라 때는 길상사,
고려 때는 수선사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때부터 송광사로 불렸다.
소나무가 무성해 당시 불렸던 ‘솔개이메(솔강이메)’에서 유래해
솔을 송(松), 갱이(광이)를 광(廣)으로 옮겨 송광산이라고 한 것으로 전한다.
전설에는 ‘송(松)’을 파자(破字)하면 ‘十八公’으로
송광사에서 18명의 국사가 나올 것이라고 풀이된다.
그래서 고려와 조선조에 16명의 국사가 배출되었으니
앞으로 2명의 국사가 더 배출된다고....
송광사는 초입부터 선암사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우화각 지나
넓은 절집, 대웅보전이 굳건하다.
송광사에서 꽃을 만났다.
산수유가 조금씩 봄을 열고 있다.
길이 아름답다.
천천히 걸어가지만
여적 계절은 따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연산봉에 머문 바람을 모두 가지고
조계산엘 잘 다녀왔다.
이제부터가 봄이로구나.